“사랑해.”
백 번 천 번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말이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그 말을 들으면 삶에 대한 고마움과 결의를 함께 느끼게 된다. 그 말이 애틋한 건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깊은 신뢰와 헌신이 따뜻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명한 기억 하나. 청년 시절 지리산에 가려고 밤차를 탔다. 창밖의 한 여자가 웃으며 ‘손’으로 말했다. 전혀 모르는 여자가 내게 어찌하여 손 인사를 건네나 싶어 의아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그녀에게 똑같이 손으로 말했다.
“사랑해.”
당시 내가 아는 수어手語는 겨우 몇 마디뿐이었지만 그 말만은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손짓도 있었지만 수어에 손방인 나로서는 해석 불가였다. 아마도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는, 또는 널 잊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소리는 전해질 수 없어도 손짓만으로도 마음 깊은곳에 자리한 깊고 너른 사랑을 전하는 고요한 언어. 그 짧은 수어는 가장 또렷한 사랑의 언어였다. 그런 수어로 조용히 말하고 싶다. 나에게, 삶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신나는 삶을 꿈꾸지만 가끔은 삶이 모지락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꼭 무슨 이유나 사연 혹은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뭔가 허전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잔망스러움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것들까지도 내 삶의 두툼한 속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알면서도, 늘 재고 따지고 근수를 가늠하는 데에 익숙해서 그런 것들이 허튼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동동거린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과 태도 그리고 행동에 감동하고 고마워하며 응원할 수 있기만 해도 삶이 그리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보다 귀한 건 없다. 미운 사람도 있지만 고맙고 살가운 이들이 더 많다. 좋은 사람과 아름답게 살기에도 삶은 짧다. 그 생각만 놓치지 않아도 삶의 밀도를 충일하게 만들 수 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힘을 얻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힘을 주며 살면 족하고 고맙다. 사람에 대한 고마움만큼 도타운 건 없다.
모처럼 나타나는 따사로운 햇살에 감동하는 건 그만큼 대기가 오염되고 기후 위기가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산에 올라서야 비로소 산소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처럼 사소하다고 여기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만 있어도 우리의 삶은 조금은 더 의연해지고 민틋한 삶의 표면들이 지루하지 않고 두툼해질 수 있다. 정화(淨化)는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이 좋은 것들로만 꽉 찬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삶의 진수는 지치고 힘들 때 혹은 속이 텅 비었다고 느낄 때 만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 누군가가 곁에 혹은 마음에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런 사람이 고맙고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서로 도닥일 수 있겠다. 그렇게 가끔은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그런 시간이 있다.
해당화는 기름진 옥토가 아닌 바닷가 모래밭에서 피어난다. 거센 해풍까지 오롯이 버텨낸다. 온실에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피운 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꽃이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남들은 다 어렵다고 해도 의연하게 그것을 품어내고 겪어내며 마침내 자신을 피워내는 것보다
아름다운 건 흔치 않다. 삶도, 세상도, 사람도 그렇다. 하물며 꽃도 그렇게 피는데 꽃보다 더 귀한 사람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상에는 시시한 사람도 시시한 삶도 없다.
요란하지 않고 담백한 삶은 얼핏 무를 씹는 맛과 흡사하다. 담백한 사람도 그렇다. 이 글은 그런 이들에게 바치는 작은 꽃묶음이다. 이름 모를 꽃(물론 이름이 없지는 않겠으나) 한 송이에도 깨달음은 가득하다. 시인 반칠환은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고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며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에 불과하다고 읊었다. 그런데 한껏 잘난 척하는 우리는 그 좁은 땅에서 지지고 볶으며, 상처와 쓰라림을 주고받으며 산다.
그 작고 수줍은 제비꽃보다도 우리네 삶이 못해서야 안 될 일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먼저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자비를 나눌 수 있다면 조금은 고맙게 살 수 있겠다.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속도를 잠시만 늦출 수 있으면 삶이 조금은 덜 팍팍하고 생각과 영혼의 거리가 떨어지지 않고 밀도가 높아진다. 그걸 깨우쳐주는 사람들이 나의 성긴 영혼을 밭게 조이고 기름칠해준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고요한 새벽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한다. 나의 오늘 하루가, 당신의 시간이 따뜻하고 농밀하기를! 쥘 르나르의 《인간과 자연에 관한 에스프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닫힌 우리 속에서 두 놈이 서로 몸을 포갠 채로 납작하게 엎드려 잠들어 있습니다.
몸져누운 이웃집 청년을 찾아온 여인이 나란히 벗어놓은 나막신 두 짝처럼
마음이 이어지고 생각이 만나는 순간이 있다. 삶이 늘 힘겹기만 한 건 아니다. 또한, 늘 멋지고 신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날도 있어서 삶이 무료하지 않으면 고마운 일 아닐까?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응원해주고 지켜봐주고 있다는 연대감을 느끼면 그 시간을 넉넉하게 버텨낼 힘이 생긴다. 따뜻한 마음과 속 깊은 배려만으로도 우리는 가뿐하게 그 심연을 건널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 그런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연대감을 느낀다.
워낙 사는 게 혼란스럽고 힘겨울 때도 나를 깨우고 더 나은 삶의 희망을 주는 이들이 고맙다. 그래서 겪은 일, 듣거나 본 것, 전해 들은 이야기, 책을 읽다 적어둔 감동 등을 모아서 함께 읽고, 느끼며,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응원하고 연대하는 힘을 담고 싶었다. 그런 이들이 있어 눈물 나게 고맙고 삶이 튼실해진다. 텅 빈 세상에 혼자 내팽개쳐졌다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여유와, 자기 삶의 속살을 그대로 내보여주며 우리를 다독여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살면, 조금은 사는 게 성긴 듯 밭지 않고, 밭은 듯 성기지 않게, 그렇게 차츰 너그러워질 것 같다.
요만조만하게 보일지 몰라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삶이 있다. 그게 우리의 삶을 도탑게 해준다. 나도 그렇게 당신의 신발 옆에 나란히 벗어놓은 고무신이고 싶다. 혹은 그 신발을 올려놓는 섬돌이고 싶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친밀하고 속 깊은 인간학 수업이다. 그대가 있어 내 삶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대가 바로 내 삶의 격려와 힘이 됨을 조용하게 고백하고 싶다.

“사랑해.”
백 번 천 번 들어도 지겹지 않은 말이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어도 그 말을 들으면 삶에 대한 고마움과 결의를 함께 느끼게 된다. 그 말이 애틋한 건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깊은 신뢰와 헌신이 따뜻하게 담겨 있기 때문이다.
선명한 기억 하나. 청년 시절 지리산에 가려고 밤차를 탔다. 창밖의 한 여자가 웃으며 ‘손’으로 말했다. 전혀 모르는 여자가 내게 어찌하여 손 인사를 건네나 싶어 의아했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그녀에게 똑같이 손으로 말했다.
“사랑해.”
당시 내가 아는 수어手語는 겨우 몇 마디뿐이었지만 그 말만은 또렷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손짓도 있었지만 수어에 손방인 나로서는 해석 불가였다. 아마도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는, 또는 널 잊지 않겠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소리는 전해질 수 없어도 손짓만으로도 마음 깊은곳에 자리한 깊고 너른 사랑을 전하는 고요한 언어. 그 짧은 수어는 가장 또렷한 사랑의 언어였다. 그런 수어로 조용히 말하고 싶다. 나에게, 삶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신나는 삶을 꿈꾸지만 가끔은 삶이 모지락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꼭 무슨 이유나 사연 혹은 굴곡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저 뭔가 허전하고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잔망스러움에 당혹스러울 때도 있다. 그런 것들까지도 내 삶의 두툼한 속살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함을 알면서도, 늘 재고 따지고 근수를 가늠하는 데에 익숙해서 그런 것들이 허튼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동동거린다. 하지만 사람들이 보여주는 따뜻한 마음과 태도 그리고 행동에 감동하고 고마워하며 응원할 수 있기만 해도 삶이 그리맵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보다 귀한 건 없다. 미운 사람도 있지만 고맙고 살가운 이들이 더 많다. 좋은 사람과 아름답게 살기에도 삶은 짧다. 그 생각만 놓치지 않아도 삶의 밀도를 충일하게 만들 수 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힘을 얻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힘을 주며 살면 족하고 고맙다. 사람에 대한 고마움만큼 도타운 건 없다.
모처럼 나타나는 따사로운 햇살에 감동하는 건 그만큼 대기가 오염되고 기후 위기가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산에 올라서야 비로소 산소의 중요성을 깨닫는 것처럼 사소하다고 여기던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느낄 수만 있어도 우리의 삶은 조금은 더 의연해지고 민틋한 삶의 표면들이 지루하지 않고 두툼해질 수 있다. 정화(淨化)는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삶이 좋은 것들로만 꽉 찬다고 꼭 좋은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삶의 진수는 지치고 힘들 때 혹은 속이 텅 비었다고 느낄 때 만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럴 때 누군가가 곁에 혹은 마음에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도 큰 위로와 힘이 된다. 그런 사람이 고맙고 또한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 때, 인생은 살 만한 것이라고 서로 도닥일 수 있겠다. 그렇게 가끔은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는, 그런 시간이 있다.
해당화는 기름진 옥토가 아닌 바닷가 모래밭에서 피어난다. 거센 해풍까지 오롯이 버텨낸다. 온실에서 온갖 정성을 다 기울여 피운 꽃이 아니다. 그래서 그 꽃이 더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남들은 다 어렵다고 해도 의연하게 그것을 품어내고 겪어내며 마침내 자신을 피워내는 것보다
아름다운 건 흔치 않다. 삶도, 세상도, 사람도 그렇다. 하물며 꽃도 그렇게 피는데 꽃보다 더 귀한 사람의 삶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세상에는 시시한 사람도 시시한 삶도 없다.
요란하지 않고 담백한 삶은 얼핏 무를 씹는 맛과 흡사하다. 담백한 사람도 그렇다. 이 글은 그런 이들에게 바치는 작은 꽃묶음이다. 이름 모를 꽃(물론 이름이 없지는 않겠으나) 한 송이에도 깨달음은 가득하다. 시인 반칠환은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고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며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에 불과하다고 읊었다. 그런데 한껏 잘난 척하는 우리는 그 좁은 땅에서 지지고 볶으며, 상처와 쓰라림을 주고받으며 산다.
그 작고 수줍은 제비꽃보다도 우리네 삶이 못해서야 안 될 일이다. 그러니 자신에게 먼저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다른 이들에게도 그 자비를 나눌 수 있다면 조금은 고맙게 살 수 있겠다.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속도를 잠시만 늦출 수 있으면 삶이 조금은 덜 팍팍하고 생각과 영혼의 거리가 떨어지지 않고 밀도가 높아진다. 그걸 깨우쳐주는 사람들이 나의 성긴 영혼을 밭게 조이고 기름칠해준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고 싶다.
고요한 새벽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며 생각한다. 나의 오늘 하루가, 당신의 시간이 따뜻하고 농밀하기를! 쥘 르나르의 《인간과 자연에 관한 에스프리》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닫힌 우리 속에서 두 놈이 서로 몸을 포갠 채로 납작하게 엎드려 잠들어 있습니다.
몸져누운 이웃집 청년을 찾아온 여인이 나란히 벗어놓은 나막신 두 짝처럼
마음이 이어지고 생각이 만나는 순간이 있다. 삶이 늘 힘겹기만 한 건 아니다. 또한, 늘 멋지고 신나는 것도 아니다. 좋은 날도 있고 궂은날도 있어서 삶이 무료하지 않으면 고마운 일 아닐까? 그럴 때마다 누군가가 나를 응원해주고 지켜봐주고 있다는 연대감을 느끼면 그 시간을 넉넉하게 버텨낼 힘이 생긴다. 따뜻한 마음과 속 깊은 배려만으로도 우리는 가뿐하게 그 심연을 건널 수 있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 그런 삶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연대감을 느낀다.
워낙 사는 게 혼란스럽고 힘겨울 때도 나를 깨우고 더 나은 삶의 희망을 주는 이들이 고맙다. 그래서 겪은 일, 듣거나 본 것, 전해 들은 이야기, 책을 읽다 적어둔 감동 등을 모아서 함께 읽고, 느끼며, 서로의 존재에 대해 응원하고 연대하는 힘을 담고 싶었다. 그런 이들이 있어 눈물 나게 고맙고 삶이 튼실해진다. 텅 빈 세상에 혼자 내팽개쳐졌다고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 여유와, 자기 삶의 속살을 그대로 내보여주며 우리를 다독여주는 이들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살면, 조금은 사는 게 성긴 듯 밭지 않고, 밭은 듯 성기지 않게, 그렇게 차츰 너그러워질 것 같다.
요만조만하게 보일지 몰라도 큰 울림을 줄 수 있는 사람과 삶이 있다. 그게 우리의 삶을 도탑게 해준다. 나도 그렇게 당신의 신발 옆에 나란히 벗어놓은 고무신이고 싶다. 혹은 그 신발을 올려놓는 섬돌이고 싶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가장 친밀하고 속 깊은 인간학 수업이다. 그대가 있어 내 삶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대가 바로 내 삶의 격려와 힘이 됨을 조용하게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