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 허름했고 패기만 가득했던 그때의 시간들을 다시 꺼내놓기로 결심한 건 강원도에서 온 학생들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그룹이 유럽으로 종교 탐방 여행을 온 것이다. NGO 활동가의 인솔하에 경비를 아끼느라 체코부터 독일, 스위스까 지 승합차를 렌트해 국경을 횡단하며 제네바에 도착했다. 나는 일요일 오후 학생들을 미술관 카페로 초대했다. 추운 겨울 에 여행을 다니느라 모두들 매우 피곤해 보였다. 얼른 따뜻한 차를 주문하고 스위스 초콜릿을 나눠주고는 내 소개를 했다. “여러분 저도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춘천에서 공부했고요. 지금은 스위스 제네바에 와서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의욕 없이 초콜릿을 먹던 학생들이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 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한 명이 손을 들더니 질문을 했다. “전공이 뭐예요? 어느 대학 나왔어요?” 한참 대답하는데 옆 친구와 키득대며 장난을 치던 한 학생 이 고개를 내밀며 큰소리로 물었다. “영어를 얼마큼 잘해야 국제기구에서 일할 수 있나요?”
호기심 많은 삶을 살고 싶어서, 답 없는 인생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겁도 없이 타국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주변의 수많은 스승이 가능성을 알려주고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일 누군가에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 떤 방법이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다.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 을까?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글을 통해서라면 그 소임을 완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쓰기 시작했다. 영어를 얼 마나 잘해야 국제기구에서 일할 수 있는지, 일의 세계에서 어 떤 언어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 책은 풀리지 않는 인생을 두고 좌절하던 스물일곱 살, 취직 시험도 토익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아 무작정 여권을 갱 신하고 어학연수를 떠난 이야기로 시작된다. 빈털터리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서 언어에 집착하며 흡수해나가 던 초보 영어생활자로서의 좌충우돌 경험담들이다.
그다음 2부는 NGO에 합격한 후 유럽으로 떠나 첫 해외 취업에서 발 돋움해나간 이야기들이다. 여러 인종의 사람을 만나면서 다 양한 영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무에서 가장 기본 이라 할 수 있는 이메일 및 문서 작성에서 겪어야 했던 서투 른 실수담을 매우 솔직하게 꺼내놓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 면 곳곳에서 그때 내가 배운 업무 영어 스킬을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3부는 한국에서 배웠던 사회생활의 많은 오류를 털고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해간 시간들을 회상했다. 우선순위가 바뀐 세계의 시야와 질서 속에서 매일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 졌는지, NGO의 멘토에게서 배운 언어적, 비언어적 커뮤니케 이션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 공평한 관계 맺음이 사회생활 의 체질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그 과정을 담았다.
편견이 깨지고 고집이 꺾이며 글로벌 환경에 필요한 포용성을 차차 습 득해나간 깨우침의 순간들이다. 마지막 부에서는 국제기구 인턴십을 시작하며 겪은 일들에 대해 썼다. 스케일이 커져버린 환경에서 프로다운 책임감을 장착하며 1인의 몫을 해내려고 애쓴 이야기들이다. 전문가들의 용어를 서둘러 숙달하고 미션을 차근차근 완수해나간 일, 국제회의 조직팀에서 굵직한 일들을 맡은 일, 그동안 단련해온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하며 맷집으로 하나씩 해결해나간 일 등 존재감을 드러내며 실무자로서 한층 숙련되어 가는 모습을 담았다. 이미 글로벌한 환경에서 공부하거나 주재원의 가족으로 외국 어딘가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필요치 않은 이야기 일 수도 있겠다. 부모님 찬스도 지인 찬스도 없이 해외 인턴십 에 도전해야 할 학생들이 질문할 법한 내용에 성실히 답한 것에 가깝다. 찌질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분투했던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뜰 채로 건져 올려 글을 썼다. 잘못 배운 사회생활의 루틴을 씻어 내느라 얼마나 구르고 애쓰며 배웠는지 양념을 버무릴 필요도 없이 굴욕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그렇게 겪은 많은 일을 우연이었다거나 실수였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일상을 책임지는 최선의 정성이었다. 결국 많은 오류는 모조리 교훈이 되었다. 내게 질문했던 그 고등학생이 10년이 지나 사회초년 생이 되었을 때 세상이 내게는 더 좋은 기회를 주지 않는구나 자조하게 된다면, 나라도 내 인생을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나의 경험담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랬으니까. 내 앞의 모든 길이 막혔다고 판단했을 때 국경을 넘었으니까. 과거를 다시 탐색하며 만난 건 한 가지 명제였다.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적응력을 가졌다는 것. 변화를 원한다면 최소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듬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떠나 영어라는 언어를 다시 배우면서 얻은 것은 헷갈리던 시제나 가정법이 아닌 신기하게도 나 자신이란 영역이었다. 언어는 시야와 순서와 습관을 전부 뒤집었다. 다양한 세계를 스치며 글로벌 환경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우며 조금씩 진화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쾌감은 강력했다. 나름의 방식으로 헤매며 두 발로 전진해야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 여정 안에서 내면의 힘과 생존 력이 깊고 깊게 축적된 바로 나 자신을 알게 된다. 그 단단함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언어를 배우겠다고 길을 나선 내가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한 것처럼, 평생 끝나지 않는 신기한 프로젝트인 나 자신을 꼭 발견해보길 바란다. 호기심 많은 삶의 자세가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2023년 제네바에서 백애리

일상이 허름했고 패기만 가득했던 그때의 시간들을 다시 꺼내놓기로 결심한 건 강원도에서 온 학생들 때문이었다. 고등학생 그룹이 유럽으로 종교 탐방 여행을 온 것이다. NGO 활동가의 인솔하에 경비를 아끼느라 체코부터 독일, 스위스까 지 승합차를 렌트해 국경을 횡단하며 제네바에 도착했다. 나는 일요일 오후 학생들을 미술관 카페로 초대했다. 추운 겨울 에 여행을 다니느라 모두들 매우 피곤해 보였다. 얼른 따뜻한 차를 주문하고 스위스 초콜릿을 나눠주고는 내 소개를 했다. “여러분 저도 강원도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춘천에서 공부했고요. 지금은 스위스 제네바에 와서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의욕 없이 초콜릿을 먹던 학생들이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 기 시작했다. 슬그머니 한 명이 손을 들더니 질문을 했다. “전공이 뭐예요? 어느 대학 나왔어요?” 한참 대답하는데 옆 친구와 키득대며 장난을 치던 한 학생 이 고개를 내밀며 큰소리로 물었다. “영어를 얼마큼 잘해야 국제기구에서 일할 수 있나요?”
호기심 많은 삶을 살고 싶어서, 답 없는 인생을 내려놓고 한국을 떠났던 순간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겁도 없이 타국에 도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주변의 수많은 스승이 가능성을 알려주고 보여줬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일 누군가에게 그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어 떤 방법이 있을까 수없이 고민했다. 어떤 이야기를 해줄 수 있 을까? 물리적인 거리를 뛰어넘어 글을 통해서라면 그 소임을 완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쓰기 시작했다. 영어를 얼 마나 잘해야 국제기구에서 일할 수 있는지, 일의 세계에서 어 떤 언어와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이 책은 풀리지 않는 인생을 두고 좌절하던 스물일곱 살, 취직 시험도 토익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아 무작정 여권을 갱 신하고 어학연수를 떠난 이야기로 시작된다. 빈털터리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미국에서 언어에 집착하며 흡수해나가 던 초보 영어생활자로서의 좌충우돌 경험담들이다.
그다음 2부는 NGO에 합격한 후 유럽으로 떠나 첫 해외 취업에서 발 돋움해나간 이야기들이다. 여러 인종의 사람을 만나면서 다 양한 영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실무에서 가장 기본 이라 할 수 있는 이메일 및 문서 작성에서 겪어야 했던 서투 른 실수담을 매우 솔직하게 꺼내놓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라 면 곳곳에서 그때 내가 배운 업무 영어 스킬을 배워갈 수 있을 것이다. 3부는 한국에서 배웠던 사회생활의 많은 오류를 털고 새로운 업무 환경에 적응해간 시간들을 회상했다. 우선순위가 바뀐 세계의 시야와 질서 속에서 매일의 일상이 어떻게 달라 졌는지, NGO의 멘토에게서 배운 언어적, 비언어적 커뮤니케 이션 방식과 일을 대하는 태도, 공평한 관계 맺음이 사회생활 의 체질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그 과정을 담았다.
편견이 깨지고 고집이 꺾이며 글로벌 환경에 필요한 포용성을 차차 습 득해나간 깨우침의 순간들이다. 마지막 부에서는 국제기구 인턴십을 시작하며 겪은 일들에 대해 썼다. 스케일이 커져버린 환경에서 프로다운 책임감을 장착하며 1인의 몫을 해내려고 애쓴 이야기들이다. 전문가들의 용어를 서둘러 숙달하고 미션을 차근차근 완수해나간 일, 국제회의 조직팀에서 굵직한 일들을 맡은 일, 그동안 단련해온 언어에 대한 자신감을 확인하며 맷집으로 하나씩 해결해나간 일 등 존재감을 드러내며 실무자로서 한층 숙련되어 가는 모습을 담았다. 이미 글로벌한 환경에서 공부하거나 주재원의 가족으로 외국 어딘가에서 지내는 사람들에게는 필요치 않은 이야기 일 수도 있겠다. 부모님 찬스도 지인 찬스도 없이 해외 인턴십 에 도전해야 할 학생들이 질문할 법한 내용에 성실히 답한 것에 가깝다. 찌질하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분투했던 이야기가 필요한 이들에게 가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히 뜰 채로 건져 올려 글을 썼다. 잘못 배운 사회생활의 루틴을 씻어 내느라 얼마나 구르고 애쓰며 배웠는지 양념을 버무릴 필요도 없이 굴욕적인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그렇게 겪은 많은 일을 우연이었다거나 실수였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 나의 일상을 책임지는 최선의 정성이었다. 결국 많은 오류는 모조리 교훈이 되었다. 내게 질문했던 그 고등학생이 10년이 지나 사회초년 생이 되었을 때 세상이 내게는 더 좋은 기회를 주지 않는구나 자조하게 된다면, 나라도 내 인생을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면, 나의 경험담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내가 그랬으니까. 내 앞의 모든 길이 막혔다고 판단했을 때 국경을 넘었으니까. 과거를 다시 탐색하며 만난 건 한 가지 명제였다. 인간은 말도 안 되는 적응력을 가졌다는 것. 변화를 원한다면 최소한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다듬어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을 떠나 영어라는 언어를 다시 배우면서 얻은 것은 헷갈리던 시제나 가정법이 아닌 신기하게도 나 자신이란 영역이었다. 언어는 시야와 순서와 습관을 전부 뒤집었다. 다양한 세계를 스치며 글로벌 환경에서 공존하는 법을 배우며 조금씩 진화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쾌감은 강력했다. 나름의 방식으로 헤매며 두 발로 전진해야 만날 수 있는 순간들이었다. 포기하지 않고 길을 찾으려면 어쩔 수 없다. 그 여정 안에서 내면의 힘과 생존 력이 깊고 깊게 축적된 바로 나 자신을 알게 된다. 그 단단함은 아무도 건드리지 못한다. 언어를 배우겠다고 길을 나선 내가 낯선 곳에서 스스로를 재발견한 것처럼, 평생 끝나지 않는 신기한 프로젝트인 나 자신을 꼭 발견해보길 바란다. 호기심 많은 삶의 자세가 여러분을 도울 것이다.
2023년 제네바에서 백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