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관통하는 길에 동료가 있다고 느낄 수 있기를 _오희승 작가

2020년 가을의 일이었다. 코로나로 외부활동에 제약이 생기고, 꽤나 긴 기간 동안 격리 아닌 격리 생활을 했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호소했다. 자유로운 활동이 축소된다는 박탈감, 불투명한 미래에의 불안, 치료가 되지 않는 병에 대한 무력함과 공포가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그 아우성은 내가 불편한 몸으로 살아가면서 일상적으로 느꼈던 좌절과 닮아 있었다. 분위기에 휩쓸려, 아팠던 시절과 수술을 받았던 경험,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 몇 편의 글을 SNS에 올렸다. 늘 가슴속 한구석을 차지하던 이야기였지만 평소에는 쉽게 꺼내지 못했는데 어쩐 일인지 툭 내려놓듯이 편하게 써 내려갔다. 가볍게 지난 기억을 기록으로 남겨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글을 읽은 몇몇 친구들이 좀 더 발전시켜서 책으로 내면 좋겠다며 응원과 격려의 말을 해주고, 실제 출판사를 소개해주기도 했다. 기록용으로 시작한 글쓰기가 내 삶의 일부로 자리 잡게 된 순간이었다.


아픈 몸으로 사는 경험을 나누고 싶었다. 샤르코-마리-투스라는 희귀병과 퇴행성 고관절염이라는 상대적으로 흔한 병 사이에서, 불편함과 통증 사이를 부유하고 고통과 희망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했던 경험을 말이다. 아픔을 이야기하기 위해 설명해야 했던 이 병명들은, 하나는 너무 드물어서 이해시키기 어려웠고, 또 다른 하나는 너무 흔해서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경우라도 아픈 상태를 쉽게 꺼내 보이기 어려웠고, 그래서 한때는 인내와 침묵만이 미덕이라고 여겼다. 그러면서도 내내 이 불편함과 아픔을 말하고 싶은 갈증에 시달렸다. 이해받지 못할지라도.


덜컥 책을 쓴다고는 했지만 한 권을 채울 만큼 기억나는 게 많을까, 쓸 말이 있을까, 잘 써야 한다는 부담 이전에 분량 걱정부터 들 정도로 막막했다. 개인적인 하소연에 그치지 않고, 읽는 이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질병의 특수성이 강조되어야 할지, 아니면 보편적인 경험을 통한 공감이 필요할지, 욕심은 많았지만 정작 첫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고민하던 중 100미터를 35초 만에 주파해낸 초등학교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록이 인생 최고의 속도였다. 이후로는 달렸던 기억조차 없다. 왜 서서히 몸의 기능이 떨어지는지 이유를 찾지 못하고 점점 위축되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당시에는 내가 특이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에 있던 내 모습이 어쩌면 남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불안전하고 단단하지 못한 위치에 서게 된다. 꼭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취약함을 가지고 살아간다. 또 가지고 있는 취약함을 설명하고 방어할 언어를 찾지 못하기도 한다. 내가 하려는 이야기들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는 사람의 개별성과 구체적인 경험을 통해, 세상과 연결될 수 있을 거라는 소망을 품게 되었다.


글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참고할 만한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아픈 몸으로 살아가며 겪는 고통과 외로움, 삶을 향한 애착과 이별을 준비하는 절절한 이야기들을 접했다. 사회학적으로 질병의 의미를 다룬 연구,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다룬 병과 돌봄, 장애를 가진 몸에 대한 논의, 또 병을 겪는 입장에서 확장되어 간병을 하는 입장을 바라보는 책도 접했다. 책을 읽는 시간들은 글의 흐름을 잡아나가는 데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이 치유되는 경험을 했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고통과 닮은 고통을 마주했을 때 위로를 받았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삭이기만 했던 감정을 하나하나 세세히 풀어낸 문장들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기쁨과 남들에게 설명할 힘이 생겼다는 안정감을 얻었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은 폭력적이지만 ‘내가 가진 고통과 아픔은 남들도 겪는 것이구나’라고 스스로 깨달을 때에는 견딜 힘이 생긴다.


이 책을 통해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기를, 다른 병이라도 아픔을 관통하는 길에 동료가 있다고 느낄 수 있기를. 또, 가족과 친구, 아끼는 이들을 좀 더 잘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서로의 개별성과 다양성, 병의 여러 다른 양상들, 환자의 사회적 위치 등등 여러 차이 때문에 이야기를 하나로 묶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한 사람, 또 한 사람 그렇게 각자의 이야기가 더해져야 다채로운 언어가 태어난다고 믿는다. 나의 이야기도 독자의 가슴에서는 각자의 이야기로 피어나가기를 바란다.


글을 쓰면서 그동안 막연하게 힘들었던 마음이 가벼워짐을 느꼈다. 나는 아직도 눈을 감으면 종종 하이웨이스트 스커트에 하이힐을 신고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걷는 모습을 떠올릴 때가 있다. 마치 그렇게 걸으면 인생이 달라질 것처럼, 한 번도 존재해본 적 없는 나의 존재를 그리워했다. 나 자신을 돌아보는 글쓰기는 환상 속의 나를 조용히, 부드럽게 보내주었다. 아픔을 통과하고 있는 사람들이 어떤 위로를 얻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글을 썼는데 오히려 내가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누린 것이다.


이 글은 격하게 힘든 시기를 거치고 고통도 잦아들고, 불안도 가라앉은 후에 쓴 것들이다. 오랜 시간이 흐른 만큼, 당시의 생각과 느낌은 지금과는 차이가 있다. 그토록 절박하게 원하고 서글프게 원망했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는다. 그때의 날 선 감정도, 지금의 무뎌짐도 옳다. 고통 속에서 뿜어져 나오던 독과 칼 같던 생각을 가다듬어 글로 표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병은 진행형이고 몸은 노화한다. 언제 다시 고통이 일상이 될지 모른다. 지금의 찰나와 같은 순간이 드물게 찾아오는 행복 구간일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하며, 아쉬워하기보다는 현재를 더 선명하게 인식하고 감사하며 살고 싶다. 주변에서 받은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


덧붙여 사랑하는 엄마, 아빠, 나와 인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한 남편, 그리고 영문도 모르고 힘들어 보이는 엄마를 돕고 있는 나의 소중한 아이에게 항상 고맙다. 글쓰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응원해준 이서희 작가와 따뜻한 조언과 벅찬 응원을 해주신 이명수 선생님, 한 권의 책이 되도록 이끌어주신 그래도봄 대표님에게도 감사드린다.